지금까지 수 많은 PC를 만나고 떠나 보내왔지만 먼 훗날에도 가장 기억에 남을 PC는 역시 처음 만져 본 PC일 수 밖에 없죠. 현재는 결국 미래에는 큰 의미 없는 중간 과정 중 하나가 되어버릴테니까요. 제 첫 PC는 애플2였습니다. 물론 전 그 당시 초등학교 1학년, 아니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는 국민학교 1,2학년이었고 아버지께서 적어 주신 몇 몇 실행 명령어를 그림 찾듯이 찾아서 게임을 실행하는 수준이었죠. 가라데, 로드런너 등등 이젠 게임들도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군요. 게임도 겨우겨우 실행하던 8살짜리가 잡스, 워즈니악 같은 이름을 알 턱이 없고....PC 이름이 애플2라는건 알았지만 애플이라는 회사에서 만들었다는 것은 알았을려나 모르겠습니다. 아...그래도 이름이 있고 이름이라도 기억해준다는 것은 무척 좋은거죠. 지금 제가 쓰고 있는 PC를 20년후에 기억해줄리 없으니까요. 애플2와의 만남은 길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IBM 호환 기종으로 갈아 탔고 몇 년 동안 애플은 제가 살고 있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애플2를 처음 접했을 때는 이미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나고 넥스트와 함께 고군분투 할 때 였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길게 쓸 수도 있겠지만 관련 내용은 아무렇게나 검색해도 나올 겁니다. 전 21세기 이전에는 넥스트에 대해 알지 못 했으니 이번 글에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죠. 다른 글들과 다른 관점, 제 시야에 보였던 내용들로만 글을 써볼까 하니까요. 아무튼 스티브 잡스가 다시 대중의 눈에 띄기 시작한 건 픽사, 토이 스토리와 함께였습니다. 영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던 제게 토이 스토리는 하나의 혁신이었죠. 토이 스토리 이전까지 애니메이션 = 2D = 디즈니라고 생각되었으고 디즈니가 90년대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는 지금처럼 몰락할거라 생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토이 스토리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애니메이션 시대는 모든걸 바꿔버렸죠. 단순히 2D에서 3D로의 변화 뿐 아니라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던 착하고 모범적인 캐릭터들은 찾기 힘듭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장난감 콤비나 벽장 속 괴물들, (픽사 애니메이션이 아니더라도) 비만 팬더, 진흙에 사는 오우거가 대중에게 사랑 받는 시대가 되어버렸죠. 전 초창기부터 픽사 작품 에 열광하며사가 아직 초기 장편을 몇 개 내놓지 않았을 때 PC통신에서 픽사 단편 애니를 찾아서 보며 감탄했던 기억도 납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도 애니 앞에 있는 단편이 더 재미있는 것 같기도;;) 픽사, 디즈니, 드림웍스 등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다 보면 잡스와 별 상관 없는 이야기들이 잔뜩 나오게 될테니 다시 2000년 쯤으로 돌아가서......
당시 1~2년에 하나씩 등장하는 픽사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면서도 픽사와 스티브 잡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 했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그저 IT 역사책에만 등장하는 IT 시대를 연 사람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죠. 물론 이 맘 때는 잡스가 애플 CEO로 복귀했을 시기였지만 맥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던 제게 맥은 별 상관 없는, 디자인 하는 사람들이나 쓰는 PC, 애플은 맥 만드는 회사, 스티브 잡스는 애플 CEO일 뿐이었습니다. 오래 가진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오히려 리눅스에 더 관심이 많았었습니다. 제 눈에 애플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이팟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아이팟이라 하면 아이팟 터치를 대신해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원조 아이팟은 지금의 클래식 라인이라 할 수 있겠죠. HDD를 탑재해서 다른 MP3P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용량, 그리고 신기하게도 휙휙 넘어가는 클릭휠. 무척 매력적인 MP3P였지만 전 다른 MP3P들을 가지고 있었고 구입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당시 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사지 못 했다는게 맞는 말일지도 모르죠.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흘러서 잡스의 청바지 속에서 아이팟 나노가 등장했습니다. 당시 PT를 보며 감탄했지만 감탄 뿐이었고 1년 정도 뒤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동생이 쓰던 아이팟 나노 1세대가 제게 넘어옵니다. 애플2를 처음 접하고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다시 애플과 재회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노 1세대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리 이야기할게 많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봐도 정말 작고 가볍고 반응이 빠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나노 1세대 모델을 사용하다 몇 년 뒤 나노 4세대 모델까지 이어서 사용하며 얻은 가장 큰 경험은 아이튠즈의 사용법이었습니다. 애플의 다른 제품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접하면 어렵지만 익숙해지면 편하죠. 전 몇 년에 걸쳐 아이튠즈를 사용하며 꼬박꼬박 MP3 TAG 정리도 해왔기에 아이폰의 단점에 대해 언급할 때도 굳이 아이튠즈 이야기는 잘 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는 불편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 하지만 제가 불편함을 느끼지 못 하니 단점에 넣기는 힘들더군요. 아이튠즈가 쉽다는 사람도 있고 어렵다는 사람도 있는데 아이튠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쉬울거고 PC에 대해 전혀 알지 못 하는 사람은 오히려 이동식 디스크로 넣는 방식보다 아이튠즈가 더 쉬울 듯 합니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약이 많은 아이튠즈가 불편하게 느껴지겠죠. 저도 처음엔 불편했지만 굳이 무리해 가며 아이튠즈를 제대로 사용하게 된 이유는 사실 겉멋이었습니다. 커버플로우가 이뻤거든요. 나노에서 커버 플로우 제대로 나오게 할려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해가며 MP3 태그를 정리했던거죠. 아무튼 이 당시의 볻바은 아이팟 터치, 아이폰까지 이어졌으니 잘 한 짓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충 이 정도까지가 스티브 잡스의 공식 자서전이 아직 나오지 않은 현 시점에서 스티브 잡스의 일생을 다룬 책 중 가장 유명한 책인 '아이콘'에서 다룬 내용들이었을 겁니다. 잡스에 대해 부정적인 면들이 많아서 잡스 본인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 이 책을 다시 본다면 예고편 수준이라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이폰을 통해 모든게 바뀌었으니까요. 6년 정도 전에 휴대폰 리뷰 쪽 알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것저것 살펴 보며 알게 된 것은 '노키아는 무너지기 힘들 것 같다','통신사는 절대 갑이구나' 등등의 생각이었죠. 하지만 아이폰 등장 이후 불과 몇 년만에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아이폰 이야기를 시작할려면 먼저 아이팟 터치, 아니 PDA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네요. 전 2000년?2001년? 정도부터 셀빅i를 사용하며 남들보다 먼저 PDA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클리에 SJ20, TJ35를 사용하며 PDA를 이용한 생활 습관이 나름 생활화 되어 있죠. 제 구글 캘린더에는 10년 간의 일정이 저장되어 있으니까요. 물론 이 당시의 PDA는 PIMS 위주의 PDA였고 힘들게 인코딩한 동영상을 보거나 간단한 게임을 할 뿐이었습니다. PDA 쪽은 큰 발전이 없어서 점차 단순 PIMS 용도로만 사용하게 되고 PMP를 구입해 이동 중에는 동영상을 보며 시간을 때웠죠. 그리고 아이폰, 아이팟 터치의 등장과 함께 여러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고 있었지만 큰 관심은 없었습니다. 2009년 초, 당시 나름 현실성 있는 인터넷 서비스로 등장한 LGT OZ 햅틱온을 사용하며 '그래도 세상 많이 좋아졌네'라고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였죠.
그리고 이 때, 아직 사회 초년생 티를 벗지 못한 제게 큰 시련이 닥쳐옵니다-_-; 구안와사에 걸려 한달 동안 얼굴 반쪽이 마비됐었죠 ( 관련 이야기 : http://footoo.com/267 ). 발병과 동시에 회사에 일주일 휴가를 내놓고 나니 밖에 나가 놀 수도 없는 상황이고 시간을 때울만한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접한 뉴스 - 아이팟 터치 가격 인상 소식이었죠. 아직 대형 마트에는 인상 전 가격이 걸려 있다는 소식을 접하니, 바로 구입해서 이거나 가지고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시시한 모습으로 후드티 모자 뒤집어 쓰고 홈플러스로 달려가 터치를 구입했습니다. 부시시한 모습으로 나타나 30만원 넘는 기기를 카드 일시불로 긁는 모습이 수상해 보이는지 본인 카드 맞냐고 물어보기도 하더군요 -_-; 이 때가 아이팟 터치, iOS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기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예전과 달리 새로운 OS를 배워야 한다는건 꽤나 귀찮았습니다. 바로 탈옥해서 테마 수정하느라 좀 더 골치아프기도 했고요. 그래도 아이튠즈는 익숙했고 금새 앱스토어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앱스토어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세상을 알고 있지 못 했다는게 억울할 정도더군요. 터치에는 금방 적응 했지만 터치 사용자라면 누구나 느끼는 벽에 부딪혔습니다. 와이파이 연결이 된 경우와 연결이 되지 않은 경우, 두 환경 간 사용도 차이가 심각하게 많이 난다는거였습니다. 해결 방법은 세가지가 있습니다. 1. 그냥 참는다. 2.와이브로 에그를 사용한다 3. 아이폰이 출시되길 기다린다
아이폰 출시를 기다리며 온갖 루머가 난무했습니다. 매번 출시한다, 안한다, 이번 달에 어느 통신사에서 출시 한다 등등. 이 때 배운건 우리나라 IT 관련 기사들이 얼마나 허접한가였습니다. 팩트, 루머를 구분하지 못 하는건 물론이고 가상의 인물이라 생각되는 관계자의 인터뷰를 빌려서 마구잡이 소설을 써내더군요.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도 쭈욱 이어집니다 -_-; 수 많은 루머를 거쳐서 KT를 통해 아이폰이 정식 출시됩니다. 이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큰 변화가 오리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물론 제 예상이 어긋난 적은 수 없이 많았죠. 마우스를 처음 접했을 때도 이렇게 불편한걸 누가 사용할까? 라고 생각했었니까요. 그 때야 국민학생이긴 했었지만여. 전 애플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애플 팬보이라 불릴 타입은 절대 아니고 오히려 평소 애플에 대한 비방도 많이 해서 주변 사람들이 '넌 애플 제품을 그렇게 자주 쓰면서 왜 딴소리 하냐'라고 할 정도이니 이런 심리 때문에 초기 예판에도 참여 안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폰 사용자가 서서히 늘어나자 결국 참지 못 하고 아이폰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3Gs,4를 연달아 사용하며 아이폰이 제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기기라는걸 부인할 수 없네요. 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변했죠. 이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전에 뭘 했는지조차 잘 기억이 안 납니다. 통신사의 온갖 요구와 싸워가며 WIPI 앱을 만들어야 했던 과거도 이제 지난 이야기가 됐고, 어처구니 없는 WAP 사용료도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제 친구를 포함한 수 많은 스타트업이 앱 스토어에서 성공신화를 꿈꾸고 있죠. 아이폰이 이끌어낸 변화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애플 제품은 아이폰4, 아이팟 나노 4세대, 그리고 아이패드2입니다. 아이패드가 처음 나왔을 때도 전 부정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응처럼 화면 크기 늘려 놓은 아이폰이란 생각 밖에 들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시험공부를 위해 PDF 리더로 구입하겠다는 핑계로 산 아이패드도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라 할 수 밖에 없네요. 아이폰과 마찬가지로 태블릿 시장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런걸 보면 전 결국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하는 평범한 대중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요. 잡스가 말한 '대중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라는 오만할 말을 증명해주는 것 처럼요.
그리고 아이폰 4s의 발표에 대한 실망감이 아직 남아 있던 10월 6일 아침, 회사에서 일할 준비를 하던 중 잡스의 사망 소식을 접했습니다. 수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아이폰을 통해 잡스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국영,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느낀 감정은 내가 알던 한 세대가 끝났구나 -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잡스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는 물론 차이가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이긴 했지만 장국영, 마이클 잭슨과는 달리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잡스의 시대는 아직 -ing, 과거의 죽음이 아닌 현재의 죽음, 여전히 전성기였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여러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 처럼 전 애플 팬보이는 아니고 오히려 잡스의 독선적인 면에 불만도 많았습니다. iOS에 아주 간단한, 예를 들면 통화 목록 개별 삭제 같은 기능도 추가되는데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른 제조사였더라면 매번 단점으로 지적되는 간단한 문제를 빠르게 해결했었겠죠. 애초에 이런 반응과 요구들은 관심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세상이라는 큰 무대에서 잡스, 자신만이 원하는 발명품을 만들고 이렇게 나온 결과물이 대중도 생각하지 못 했던, 그들이 열광하는 제품이었으니까요. 물론 매번 성공했던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또 누가 5번(PC, 픽사,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세상을 흔들고 산업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한명이 초인적인 인물이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건 제가 원하는 세상과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도 애플 제품들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이러니하죠. 그래서 그의 죽음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머리 속에서 혼란스럽십니다. 제가 더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애플2를 처음 만졌던 국민학생은 이제 사회 초년생도 벗어났고, 그 국민학생이 읽던 잡지에 나오던 컴퓨터 백신 만들던 신기한 의사 선생님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고, 포레스트 검프의 상사가 애플에 투자한 주식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면 지금쯤 재벌이 되어 있겠죠. 앞으로도 많은 것이 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예상하지 못한 변화를 일으키던 사람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R.I.P. 잡스라 하고 싶지만 사후 세계가 있다면 그 곳에서 편히 쉬고만 있을 분은 아니죠. 그 곳에서도 무엇인가 혁신적인 것을 꿈 꾸고 있을 겁니다. 얼마 전에 옥탑방 고양의 정다빈은 요즘 뭐하고 있나?라고 생각했다가 곧 사람이 얼마나 쉽게 잊혀지는지 깨달으며 혼자 슬퍼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손에 잡혀 있는 잡스의 흔적과 그의 죽음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네요. 안 쓰겠다고 했지만 달리 적절한 말을 못 찾겠네요. R.I.P. Steve Jobs
[APPLE-JOBS]A symbol designed by Hong Kong design student Jonathan Mak is made available to Reuters on October 6, 2011. Nineteen-year-old Jonathan Mak, a student at Hong Kong's Polytechnic University School of Design, came up with the idea of incorporating Steve Jobs' silhouette into the bite of the Apple logo, symbolising both Jobs' departure and lingering presence at the core of the company. REUTERS/On Courtesy/Jonathan M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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